복음전파/01 은혜로운 오전

아~ 아부라함

핑안 2011. 1. 21. 10:59

아브라함

그는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는 허물도 있었지만 평생을 우직하게 걸어갔습니다.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다, 하나님을 뜻을 생각하다, 아브라함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참 힘든 삶을 삽니다.

그 이유는 결국 하나입니다.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 세상을 불평하고 불편해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깨달아 알게 하셔도 왜 변화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어야만 평안을 느낍니다.

내 머리에 생각과 계획이 들어오고 그것대로 되어야만 만족과 안정감을 누립니다.

 

왜 이것이 틀린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받아들이지 못할까요?

내 본성이고 성장과정에서 나의 모습이 된 것은 알겠는데 왜 이다지도 변화되지 않을까요?

서울을 처음 올라와서도 그랬고, 재수때도 그랬고, 처음 교회를 떠날때도 그랬고, ㅇㅇ때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고 있습니다.

 

왜 내 생각과 내 계획에 집착할까요?

왜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리 고생을 하고도, 그리 깨지고도, 그리 절망감을 맛보고도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칩니다.

100세에 얻은 외아들을 바치라는 천사의 음성을 듣고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걸어온 험난한 인생 여정 끝에 얻은 달콤한 열매와 같은 눈에 보이는 언약의 징표를 죽이라는 음성이 아브라함에게 어떻게 들렸을까요?

 

그 천사의 음성이 잘못된 것 아닐까? 마귀의 음성이지는 아닐까?

얼마나 혼란스럽고 갈등이 심했을까요?

평온한 일상에서도 혼란과 갈등으로 고뇌하는 나인데, 그 절망의 선택 앞에서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그러나 그는 순종합니다. 독자를 앞세우고 어깨에 앞서가는 이삭을 번제물로 태울 나무를 맨채 뒤를 따릅니다.

차마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지만 그의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모와 믿음과 신뢰가 그를 이끕니다.

아닙니다. 나는 모를겁니다. 그 장소에서의 아브라함의 심정을.

 

아브라함의 생각과 계획대로였다라면 그 길을 가지 말아야 합니다.

독자를 죽이러가는 길을 가고 싶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갔습니다.

 

천사의 음성인것을 옳게 분별하고 그는 그대로 따랐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계획이 왜 그를 괴롭히지 않았겠습니까? 그도 사람인데 아빈데

그러나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가장 위대한 장점인 모든 것 위에 계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믿음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위대한 교훈입니다.

모든 것 위에 계신는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모든 것을 다 맡기겠습니다. 책임지어 주십시요.

 

오직 하나님에게만 할 수 있는 고백이요, 나의 부탁입니다.

여기저기 흘릴 나의 나약함과 허물의 부스러기를 한데 모아 나는 하나님께만 쏱아 놓습니다.

아버지 이 종을 책임지어 주십시요.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 이 종이 잘하고 있는 겁니까?

때마다 이 질문이 요동칩니다.

 

아무것도 확실한게 없습니다.

의지할 수 있는게 저에게는 없습니다.

점점 더해갑니다.

 

그래서 전 아버지 아니면 안됩니다.

아버지 외롭습니다.

어서 아버지를 느끼게 해 주십시요.

 

저에게 이런 감정을 주시는 데 이유가 있지요.

그 이유를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이 같이 하지를 못합니다.

살아계셔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느끼게 해 주십시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데 왜 제가 이런 감정을 느껴야 합니까?

한시라도 빨리, 일분이라도 빨리, 일초라도 빨리 이런 저를 사로잡아 주십시요.

차분하게 해 주십시요.

 

내 욕심에 내가 지치지 않게 해 주십시요.

하나님의 때를 길게 기다릴 수 있는 종이 되게 해 주십시요.

하나님의 때가 되어야 완성되는 것을 온전히 믿고 받아들이게 해 주십시요.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앞세우고 그 길을 가면서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가기 싫은데 가는 마음, 가고 싶은데 가기 싫은 마음, 만일 아들이 죽었을 때 그에게 닥칠 절망감이 두렵지 않았을까요?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하는데, 그의 선택의 순간을 저의 삶에서도 느끼게 됩니다.

나의 삶을, 나의 과거의 습성들을, 몸에 익숙한 것들을, 의지하던 것들을, 원칙들을, 세상 재미들을

하나하나 번제물로 태워 하나님께 드리는게 힘든 것이 저의 연약함입니까? 하나님의 뜻입니까?

 

하나님 저 잘하고 있는 겁니까?

잘하고 있는거라 하시겠지요. 그런데 힘듭니다.

위로도 주시고 더 큰 걸로 채워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푸념입니다.

오늘만 이럽니다.

내일은 다시 내일에 합한 은혜를 주시고 사명인으로 굳게 세워주십시요.

 

내 의지와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결단의 순간을 허락하여 주십시요.

아버지를 믿고 의지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서 성령님으로 동행하여 주시기만을 간절히 기도하며 이 종은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마디 : 나의 뜻과 하나님의 뜻은 다르다는 것을 온전히 영접하고 겸손케 하소서

'복음전파 > 01 은혜로운 오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제 내가 원하는 것  (0) 2011.01.25
목자  (0) 2011.01.24
나의 무기  (0) 2011.01.20
한계  (0) 2011.01.19
  (0) 2011.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