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전파/03 귀한 말씀

고영수목사님_오사카중앙교회

핑안 2011. 9. 2. 17:36

의를 이루는 것(마태복음 3:13-17/2011.2.6.오전)

1. 누구라도 영국을 방문하면 반드시 가야할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대영박물관입니다.
영국이 빅토리아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전 세계를 호령하는 시절이 있었고, 그 시대를 가리켜 해가지지 않는 제국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전세계에 걸쳐 식민지를 가지지 않은 지역이 없었을 정도로 대영제국을 이룬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때 영국 사람들이 전세계의 유물과 보물들을 끌어다 영국에 가져 놓은 것이 오늘의 대영박물관이 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세계의 보물은 다 그곳에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정도로 대단한 곳입니다.
그런 세계 보물 창고는 누구나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입장료를 받지 않습니다.
대영박물관의 견학을 위해 친구 목사님이 바쁘신 중에 오셔서 하루 종일 대영박물관의 가이드 역할을 잘 해 주셨습니다.
특히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앗수르, 바벨론, 애굽에 관한 부분의 설명은 참으로 훌륭하였고,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를 예를 들자면,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사용한 물맷돌이 과연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물 맷돌은 다윗만 사용하던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군대가 적군과 싸울 때 반드시 사용하는 중요한 무기 중에 하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물 맷돌의 크기는 남아 있는 앗수르 군대의 조각된 벽화에서 나타난 대로 계란 보다 크고 야구공보다는 조금 작은 크기였다는 사실입니다.
군대의 최전열에는 궁수부대가 활을 날려 적을 제압하면, 그 뒤를 따르는 물 맷돌 부대가 날리는 돌멩이는 활보다 훨씬 멀리 날아가서 적에게 치명타를 입히고, 그 뒤를 창 부대가 따르고 있었습니다.

2. 영국은 벌써 오래 전부터 방문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곳이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길이 막혀 갈 수가 없었던 곳이었지만,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이번만큼은 방문을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에서 보고 느낀 것은 여러 가지 있지만, 그 중에 하나는 영국이 정말 살기 좋은 나라라는 사실입니다.
우선 경찰들이 미국처럼 권총으로 무장된 것이 아니라 달랑 곤봉 하나로 무장된 것입니다.
그리고 키우는 개들이 짓지 않으며 짐승들이나 새들도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로를 달리는 트럭들의 모습도 일본과는 달랐습니다.
일본의 화물 트럭들은 강력한 알류미늄 샷시로 사방을 둘러싸고 든든한 자물쇠로 채워져 있는데 반해서, 영국은 텐트 기지 같은 것으로 차량을 감싸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것들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람들이 강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평온한 환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준법정신과 사회적 공의가 살아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영국의 또 다른 특징은 일본이나 한국처럼의 산이 없다는 것입니다.
북쪽으로 가면 모를까 힐이라고 불리는 언덕은 있어도 산은 없습니다.
그 자연이 추운 한 겨울에도 전부 진한 초록으로 파릇파릇하게 뒤덮여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잔디가 겨울이 되면 금잔디가 되지만 이곳은 사시사철 초원입니다.
그러나 날씨는 고약합니다. 하루에도 여러 번 기상이 수시로 변합니다.
그래서 두 사람만 모여도 날씨 이야기를 할 정도입니다.
비와 바람과 그 위에 태양의 빛을 차단하는 두터운 구름으로 수시로 바뀌는 것이 영국의 날씨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의가 바르고 친절합니다.
영국의 기독교가 쇠퇴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들의 삶과 정신 속에는 기독교 신앙의 유산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3.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요단강으로 찾아오신 내용입니다.
세례를 받고자 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세례요한은 세례라고 하면, 죄인된 내가 예수님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입장인데 어째서 죄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세례를 받으시려고 하는가 하면서, 거절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인「의를 이루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것은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를 이루는 것과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세례에 관해서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죄를 씻는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세상 모든 죄를 지시고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온 인류의 죄를 구속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 죄 가운데서 고통 하는 인생 사이에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이었습니다.
그의 세례를 죄로 말미암아 고난 받는 백성들과 한 몸 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4.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것이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우리의 삶이 너무 바쁘고 긴장 상태에 빠져 있으며, 순간순간 믿음으로 살아가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인류의 죄를 당당한 하나님의 어린양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인류의 모든 죄를 남김없이 지시고 십자가로 나아가시겠다는 주님의 강한 의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자신이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그 모습을 통하여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예수님이야말로 죄문제를 해결하시는 완벽한 구주가 되심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세례는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고자 하시는 주님의 거룩한 의지였던 것입니다.
제가 영국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매일 헤드라인 뉴스로 장식하는 내용이 이집트의 민주화 데모입니다.
30년에 걸친 무바라크의 독재정권이 이제는 아들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세습까지 가려고 합니다.
한 때는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거두며 이집트를 지켜낸 영웅이었지만 지금은 권력에 중독된 늙은 여우에 불과합니다.
이번 사태의 초기에는 튜니지아의 영향을 받아 민주화가 곧 이루어지는가 했는데, 지금은 반정부 데모와 관제 데모가 충돌하면서 상황은 잘못된 곳으로 끌려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이집트의 데모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바로 의에 대한 부분입니다.
민중들의 의에 대한 집착과 갈등이 강할수록 독재 정권에 대한 저항은 증폭되기 마련입니다.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의가 무엇이며, 그 의를 얻기 위해 무엇을 희생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에「의를 이루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요구, 하나님의 뜻 자체가 의라는 사실입니다.
    
5. 둘째는,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자 할 때 의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길을 다니다보면 길의 좌우에 붙어 있는 수많은 표지판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 많은 표지판은 두 종류로 나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보행자를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운전자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보행자로서 다닐 때는 그 수많은 표지판들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신호와 선만 잘 지키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운전대를 잡는 순간, 상황은 달라집니다.
신호와 선은 물론이고 속도에도 신경을 써야하고, 좌로나 우측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없는지, 진입금지며, 주정차가 되는 곳인지 아닌지를 살펴야 하고, 시간대를 따라 통행을 제한하는 곳도 있고, 다리를 건널 때에도 차량의 중량을 제한하는 곳도 있으며, 길바닥 아스팔트에도 자동차 위쪽인 공중에도 주의 사항들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사거리의 신호기의 숫자에 따라 신호대기를 위해 서 있어야 할 장소가 달라집니다.
보행할 때는 전연 관심도 관계도 없는 표지판들이 자동차를 타는 순간부터 중요한 정보가 되고 주의 사항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도덕적인 법과 국가의 질서를 이루는 기본적인 법을 지키면 사람의 도리를 다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지키는 법은 물론이고, 그 위에 있는 모든 법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명령에도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있는지도 모르는 말씀의 법을 우리는 지켜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들어본 적도 없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순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 바깥에 있을 때에는 교회에 법이 있는 줄도 몰랐지만 교회 안에 들어와 믿음의 공동체가 되고 보니 교회에도 지켜야 할 법이 있는 줄 아는 것과 같습니다.  

6. 한국 교회에는 신앙적인 독특한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믿음 자체는 대단한데, 그 믿음이 삶의 현장에서는 바르게 적용되어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열정적인 찬양이며, 뜨거운 기도며 입으로는 넘치는 감사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주님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삶 속에서는 말씀의 의가 망가지고 있습니다.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뜻이 아닌 내 뜻을 이루려는 집착이 대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구 사람들은 신앙은 별로 같은데, 삶 속에 신앙의 유산이 남아 있습니다.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선행이나 구제를 좋아하고, 자연이나 짐승들 까지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며, 법에 대한 준법정신이 뛰어난 것이 전부 어디서 출발한 것입니까?
의가 무엇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아도 우리처럼 크게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복 받기를 원하면서 정작 복 받을 짓을 하지 못합니다.
정말 우리가 이 시대의 의인의 사명을 가지고 산다면, 제일 먼저 오는 변화가 환경의 변화입니다.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고, 마음 편한 환경을 만드는 것은 법이나 복지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입니다.
곧 하나님의 의가 지배하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란 음성이 임하는 줄 믿습니다.

7. 하나님의 사랑의 부음이 넘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란 어떤 것을 말합니까?
요셉과 같은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의로운 삶, 의로운 신앙이 축복의 길을 가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은 생명을 걸고서라도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 어떤 희생을 치루고서라도 순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축복의 삶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축복에 굶주렸고, 은혜와 사랑에 굶주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굶주림을 해결하고, 이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가 의인의 삶을 사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의의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닮아가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의 의를 이루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며, 둘째는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 자신을 기꺼이 주님께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들로 하여금 이 일을 온전히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으로 살면 우리는 의로운 자로서의 축복과 은혜 속에서 살 수 있습니다.
주님과 세례요한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서로가 순종하고 희생한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8.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우리가 원하는 우리의 뜻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뜻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렘29:11)는 것입니다.
의를 이루는 것은 다름 아닌 내 생각 내 뜻을 버리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 결정적인 선택이라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의가 내 삶 속에서 이루어지도록 내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잠시 잠간후면 그것이 가장 복되고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간순간 하나님의 의를 생각하며 그 의를 이루고자 하는 마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생각지도 못한 은혜와 축복이 그곳에 넘치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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